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부동 전투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전투상보를 참조해보면 험준한 산지형으로 백병전이 여러 차례 전개되었고 때에 따라 '육탄공격'도 간간히 이루어진 듯하다. >"금번 전투는 상상키 어려운 치열한 전투이었음. 특히 673.8고지 서북 약 700미터에 위치하는 무명고지(소위 700고지)를 7일간 13회에 긍하야 공격, 반복으로서 탈환한것임(제3대대 제9중대) 이 고지탈환에 성공하였을 시 적개심 충천(沖天)한[* '하늘 높이 오른다.'는 뜻이다. 흔히 "병사들의 사기가 충천하였다."라는 식으로 표현한다.]한 장병든 공수로서 적을 추격 희생자의 원한을 묻고자 『박치기』와 권투로서 전쟁하였음." >---- >'''《제1사단 11연대 다부동지구전투상보》中''' 다부동에서의 총기부족 때문에 주로 적에게서 총기를 노획하였다. 당시 제1사단은 전황이 너무도 급박하여 대대급 이하 부대의 행정요원까지 모두 전투원으로 일선에 투입하는 바람에 정확한 보충 및 사상 통계를 작성할 여유조차 없었다. 이 때문에 1950년 8월에 제1사단이 정확히 사망자를 몇 명 냈는지는 알 수 없다. 다만 전후에 피해 및 보충병 수효 등에 관한 증언을 취합해 대략적으로 추산한 결과 약 1만여 명이 손실되었다. 사단 하나가 통째로 녹아 없어진 뒤 새로 만들어진 셈. 사단장 백선엽 준장도 후일 "매일 주저앉아 울고 싶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." 하고 회고했다. 공세에 실패한 북한군의 손실은 더 처참해서, 북한군 3, 13, 15사단은 다부동 전투 기간 도합 약 3만여 명을 손실한 듯하다. 급박한 상황 때문에 지도도 제대로 못구하여 대한민국전도를 보면서 작전을 세웠다고 한다. >그때는 지도도 없었다. 사령부에서는 학교에서 구해 온 대한민국 전도를 보면서 작전을 세웠고, 일선에 나가 있던 사람들은 조그만 수첩에 실린 지도를 보면서 작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. 면 소재지에 가서 현지 지형을 그린 향토지도를 구해 가지고 와서 작전을 펼쳐야 하는 경우도 잦았다. >---- >당시 15연대 작전참모 최대명 소령 증언 다부동 전투는 북한군 입장에서도 공포감이 컸던 듯 하다. 당시 북한군 소대장이었다가 전후 한국에 남은 참전자의 증언에 따르면, 먼저 작전나갔다고 알려진 타 소대의 인원 중 단 2명만이 진중에 보이길래 나머지는 어딨냐고 물었더니 "작전 나갔다 다 죽었습니다."라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. 이는 타 북한군 부대들도 대동이소했다고. 국군 내에서 도는 말에 따르면 [[낙동강 오리알]]이 이 전투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. 당시 종군 문인으로 참전한 [[조지훈]]이 쓴 "다부원에서"가 다부동 전투를 소재로 한 것이다. 간간이 [[EBS]] 교재나 모의고사에서 볼 수 있다. 다부동 전투 직전 낙동강 전선 서남부에서는 작은 규모였고 덜 알려졌지만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인 [[마산 전투|마산 위기]]가 벌어졌다. 다부동 전투 이후의 [[영천 전투]]는 6.25전쟁의 전환점을 이룬 의미 있는 전투였다. 전투의 패배로 작전계획의 골간이 와해된 적은 전략의 근본방침을 바꿔 전면적인 철수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.[* 6.25전쟁사(5) p.466] [[6.25 전쟁]]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으로 매년 봄에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의 주도하에 칠곡대대와 성주대대, 구미대대, 왜관읍에 위치한 미군부대인 캠프 캐롤에서 유해발굴을 하는데, 반 세기를 훌쩍 넘은 유해와 유품이 많이 나온다. 한 달간 35~60구 정도를 발굴하며 치열했던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서 [[칠곡군]]을 '호국의 고장'이라 부르고, 이를 활용한 실제 평화 축전, 마라톤 등이 벌어지며 6월에는 다부동 전투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.[* 칠곡보가 완성되기 전에는 왜관 보도교 쪽에서 실시하였으나 칠곡보 완성후에는 그곳에서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.] 그리고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[[중앙고속도로]] [[다부IC|다부 나들목]] 옆에 위치하고 있다.[* 이상하게도 한국군이 운용한 적이 없는 M60 전차가 밖에 떡 하니 전시되어 있다.] 근데 그 위치 때문에 고속도로가 드리프트를 한다. 다부 나들목은 중앙고속도로에서 운전자에게 악명이 높다. 이곳 말고도 왜관읍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왜관 전적 기념관이 있다. 90년대, 00년대 당시 다부동전투기념관으로 인근 초중고 학교에서 6월 즈음해서 하루 견학을 많이 갔는데 안에 전시장 내부에 국군과 북한군이 전투하는 장면을 마네킹으로 재현해놓았다. 문제는 피칠갑에 팔 다리가 다 잘려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많은 아이들이 충격을 먹었다. 전투 중 미군 수뇌부에 [[백선엽]]을 위시로 한 국군이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간 적이 있었다. 백선엽 장군의 수기에 따르면 실제로 한국군 11연대 1대대가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2일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면서 후퇴 중이었다고 한다. 미 27연대전투단은 계곡 아래의 평탄한 회랑에서 북한군을 방어하고, 11연대 1대대는 회랑 측방의 고지를 사수하며 이를 엄호하고 있었는데 측면의 고지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면 27연대전투단은 방어는 고사하고 퇴로마저도 사라져 정말로 [[낙동강 오리알]] 신세가 되는 상황이었다. 이에 흥분한 미군은 "한국놈들이 자기네 땅을 지키는 전투에서 싸우지 않는데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가 뭐냐"면서 분통을 터트렸고, 백선엽에게 이딴 식으로 싸우면 우린 철수해 버리겠다고 항의하러 갔는데, 정작 항의하러 간 사람들은 '''사단장 백선엽이 일선에서 돌격'''하는 광경[* 11연대가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후퇴하자 병사들 앞에서 "미군도 이 낮선 땅에서 싸우는데 우리가 후퇴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. 내가 선두에 설 거니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." 하고 훈시를 하고 직접 권총 들고 돌격을 했다고 한다. 다만 부하들이 ~~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로~~ 헐레벌떡 뛰어와서 말리고 재돌격을 감행해 다부동 전투의 승리에 일조했다.]을 봤다. 결국 보고를 올린 담당자와 장교들이 사과했다.[* 당시 이 광경을 보던 27연대 마이켈리스 대령은 "사단장이 직접 앞서는 한국군은 신병(神兵)이다."라고 추켜세웠다고 한다.] 이 인연으로 백선엽은 2020년 5월 29일 [[국립서울현충원]] 매장이 무산될 경우 다부동 전적지에 묻히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. 자위대는 매년 간부후보생들을 다부동으로 보내 현장 실습한다.[[https://www.joongang.co.kr/article/12973237#home|#]] 한여름의 대구 근방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어마무시하게 더웠다. 35도를 웃도는 폭염은 예사였다고. 3개월 뒤 [[장진호 전투]]와 기상조건이 정확히 반대다. [[파일:attachment/90mm_M2_ROK_Artillery_Taegu.jpg]] 위 사진이 다부동 전투 당시 한국군이 [[90mm 대전차포#s-2.2|90mm 대공포]]로 지원사격을 하는 모습이라는 일부 설명이 있으나, 사실이 아니다. 한국전쟁 초기 한국군은 [[M3 105mm 경곡사포]] 이외에 변변한 야포를 장비하지 못했다. [* 다만 개전 초 야포 손실분을 보충하고자 수십 문의 M2 105mm 야포와 M116 75mm 경야포를 인수받았다.] 이것은 다부동 전투가 끝나고 [[인천 상륙작전]]이 감행된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에 돌입할 당시 한국군 [[제1보병사단|제1사단]] 지원차 배속된 미군 제78 대공포병대대(78th AAA Gun Battalion)의 포격 모습이다. 영화 [[태극기 휘날리며]], 드라마 [[로드 넘버 원]]에서 등장한다. 아무래도 특공조의 활약과 극적인 역전이 대중들에게 유명한 전투이다보니 두 작품 모두 주연이 특공조를 조직하고 작전을 수행한다는 공통점이 있다. 다부동전적기념관[[http://www.dabu.or.kr/|#(사운드 자동재생 주의)]][* 사실 국방부에선 적성국가 교범, 즉 북한군 교범을 참조해서 병기이름을 정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.] 2019년 NHK에서 방영한 '''숨겨진 전쟁협력 - 한국전쟁과 일본인''' 다큐멘터리, 해당 다큐를 바탕으로 출간된 '''『한국전쟁에서 싸운 일본인』'''(후지와라 가즈키 저, 박용준 번역)[[http://somyong.co.kr/bbs/product-view.php?pmode=view&idx=418&cat_no=&offset=)|#]]에 따르면, 일본인 약 70여 명[* 전원 군무원이며 계원, 취사병 등 전투지원근무를 하던 이들이다. 하지만 전투가 치열해지자 소총수로 강제 전환당해서 싸우게 되었다.]이 미군 소속으로 한국으로 파병되었고 그 중 18명이 지상전에[* 소해전, 물자보급 등의 해상 임무를 위해 투입된 일본인이 다수 있었다.] 투입되었고 4명이 전사했다고 한다. 그 중 1명이 다부동 전투에서 전사했는데, 그의 이름은 '히라츠카 시게하루(平塚重治)'인데, 그의 동생 히라츠카 데루마사(平塚昭正)가 직접 다부동 전투의 격전지 중 하나인 경상북도 가산으로 찾아오기도 했다.[* 다만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는 일본인의 지상전 참전을 인정하지 않으며, 미국 정부와 국방부 또한 별 다른 의견은 없다.[[https://www.asahi.com/sp/articles/ASN6S4CT3N6QUHBI00H.html|#]]] [[파일:히라쓰카 가문.png ]] [[파일:히라쓰카 시게하루.png ]] 이 전투를 기념해서 [[중앙고속도로]] 초기 계획부터 고속도로가 무조건 다부리를 거치도록 계획을 잡았고, 그 결과 [[다부터널]]과 [[다부IC]]가 생겨났다. 다부리는 인구가 고작 350명에 불과한 작은 동네라서 원래라면 고속도로가 안 지나가는 것이 맞는데, 다부동 전투 때문에 일종의 군사 성지가 되었으므로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가 다부리를 직접 들어오게 되었다. [각주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